리딩방 사기 287억, 바카라 테이블로 간 돈의 길

주식이나 코인을 하는 사람이라면 "고수익 보장, 전문가가 종목 찍어 드립니다" 같은 메시지를 한 번쯤 받아 봤을 것이다. 나도 받아 봤다. 그럴 때마다 차단을 누르고 바로 잊었다. 내 투자 실력은 몰라도 차단 버튼 찾는 속도만큼은 꽤 자신 있다. 그런데 이번 주에 나온 사건을 읽고 나서는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이 메시지 뒤에서 돈은 실제로 어디로 흘러갈까. 따라가 보니 그 길은 카지노 바카라 테이블에서 끝났다.
무슨 일이 있었나
부산경찰청 광역범죄수사대는 2026년 10월 15일 브리핑에서 투자사기 피해금을 카지노에서 세탁한 일당 54명을 검거하고, 국내 총책인 50대 남성 A씨 등 14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혐의는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위반,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등이다. 검거된 사람 중에는 조직원만 있었던 게 아니다. 대포계좌를 대 준 사람도 함께 잡혔다.
- 기간: 2025년 10월~12월
- 장소: 국내 카지노 4곳
- 피해자: 555명
- 세탁한 금액: 287억 원
돈의 출발점은 투자리딩 사기다. 고수익을 미끼로 투자금을 받아 내고, 허위 사이트에는 그 돈이 멀쩡히 굴러가는 것처럼 숫자를 띄워 둔다. 수법 자체는 새로울 게 없다.
돈은 어떻게 '깨끗해'졌나
조직은 역할을 잘게 나눴다. 총책, 모집·관리책, 인출책, 환전책, 전달책. 웬만한 회사 조직도처럼 생겼다. A씨는 국내에 머물면서 해외 조직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범행 전체를 지휘했다. 더팩트 보도를 바탕으로 돈의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다.
피해자 입금
→ 인출책 본인 명의 계좌
→ 카지노 안 은행에서 수표로 인출
→ 수표를 게임 칩으로 교환
→ 환전책이 바카라 양쪽에 베팅해 현금화
→ 카지노 안 은밀한 장소에서 전달책에게
→ 총책 → 해외 조직
처음부터 수표를 쓴 건 아니다. 원래는 피해금을 카지노 전용 계좌로 곧장 이체해 칩으로 바꿨다. 그러다 강원랜드 카지노 전용 계좌가 지급정지되는 등 길이 막히자 수표 방식으로 갈아탔다고 한다. 한쪽 길이 막히면 바로 옆길을 뚫었다.
바카라 '양쪽 베팅'이 세탁이 되는 원리
바카라는 크게 플레이어와 뱅커 중 한쪽에 거는 게임이다. 그런데 한 판에서 플레이어와 뱅커 양쪽에 같은 금액을 나눠 걸면 어떻게 될까. 한쪽은 잃고 다른 쪽은 딴다. 왼쪽 주머니에서 오른쪽 주머니로 돈을 옮긴 것과 다를 게 없다. 조직 전체로 보면 돈은 거의 그대로 남고, 하우스 수수료 정도만 빠져나간다. (기사에는 '양쪽에 돈을 거는 방식'까지만 나오고, 이 원리 풀이는 내 해석이다.)
대신 돈에 붙은 '이름표'가 바뀐다. 사기 피해자 계좌에서 나온 돈이 "카지노 게임에서 딴 돈" 이 되어 현금으로 나온다. 수수료를 조금 내고 출처를 지우는 셈이다. 그러려면 판돈을 크게 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고액 게임이 가능한 카지노 VIP 회원과, 외국인 전용 카지노에 드나들 수 있는 영주권자들이 환전책으로 포섭됐다. (구체적인 수수료율은 자료에 없어서 여기서는 원리만 적는다.)
숫자로 보기
먼저 경찰이 확보한 돈이다. 현금 약 1억 1100만 원을 압수했고(명품, 휴대전화·컴퓨터 50여 대는 따로), 부동산 등 약 3억 9000만 원 상당 재산은 기소 전 추징보전 인용 결정을 받았다. 둘을 더해 피해액과 견줘 보면 이렇다(내 계산값).
(1.11억 + 3.9억) ÷ 287억 = 5.01억 ÷ 287억 ≈ 1.7%
287억 원이 세탁됐는데 지금 손에 잡힌 건 5억 원 남짓이다. 나머지는 이미 해외 조직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피해자 한 명으로 나누면 평균 약 5,170만 원(287억 ÷ 555, 계산값)이다. 누군가에게는 몇 년치 저축이었을 돈이다.
전국 규모와도 견줘 봤다. 서울신문이 허영 의원실을 통해 받은 경찰청 투자리딩방 신고 현황은 다음과 같다.
| 기간 | 신고 건수 | 피해액 |
|---|---|---|
| 2023년 9~12월 | 1,452건 | 1,266억 원 |
| 2024년 | 8,104건 | 7,104억 원 |
| 2025년 | 6,853건 | 6,581억 원 |
2025년 건당 평균 피해액은 9,603만 원이다. 이번 사건의 287억 원은 2025년 전국 신고 피해액 6,581억 원의 약 4.4%(계산값)에 해당한다. 두 통계는 같은 기준으로 집계된 게 아니니 규모를 어림하는 정도로만 보는 게 맞다. 그래도 조직 하나가 석 달 만에 1년치 신고 피해액의 몇 %를 처리했다는 건 가볍게 넘길 숫자가 아니다.
내 생각: 개인 투자자로서 볼 지점
이 사건에서 내 눈에 걸린 건 두 가지다.
1. 리딩방의 경고 신호는 정해져 있다. 서울신문 기사에서 서준범 변호사가 설명한 전형적인 수법은 이렇다. 가짜 HTS(증권사 주식거래 프로그램) 앱을 깔게 하고, 화면에 큰 수익을 띄워 보여 준 뒤 투자금을 키우게 한다. 같은 기사는 한 번 당한 사람에게 "손실 복구"를 내세워 다시 접근해 빚까지 지게 만드는 2차 피해도 짚었다. 추리면 이렇다.
- 고수익을 미끼로 내건다
- 공식 앱스토어나 증권사가 아닌 경로로 거래 앱을 깔게 한다
- "지금 안 들어가면 늦는다"며 서두르게 한다
- 잃은 돈을 되찾아 주겠다며 다시 연락이 온다
개발자 눈으로 보면 가짜 HTS 화면은 숫자를 찍어 주는 화면일 뿐이다. 거기 뜬 잔고는 실제 증권사 계좌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프론트엔드에서는 0 하나 더 붙이는 데 1초도 안 걸린다. 그러니 원칙은 하나면 된다. 내 돈이 진짜 증권사 계좌에 있는지는 그 증권사의 공식 앱으로만 확인한다. 이것만 지켜도 꽤 많이 걸러진다.
2. "수수료 줄게, 수표만 뽑아 줘"는 곧 인출책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오래 머릿속에 남은 대목이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개인 차량이나 렌터카로 불법 유상운송을 하던 기사 한 명이 손님으로 만난 총책과 가까워졌다. 그리고 주변 기사들에게 수당을 주는 조건으로 인출책 일을 맡긴 정황이 경찰 수사로 드러났다. 처음엔 쉬운 부업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 끝은 범죄 혐의였다. 경찰도 이렇게 당부했다.
"고액의 수수료를 주겠다며 현금이나 수표의 인출·전달을 요구하면 범죄자금일 가능성을 의심하고 응하지 말아야 한다" — 부산경찰청 관계자(더팩트)
내 계좌를 빌려주거나 남의 돈을 대신 뽑아 전해 주는 일은 피해자가 되는 길이 아니다. 가해자가 되는 길이다.
수사의 끈기도 눈에 띄었다. A씨는 2024년 8월께 자금세탁 혐의로 수배된 뒤 다른 사람 명의의 휴대전화와 차량으로 도피해 왔다. 또 한 명은 10년 전 같은 종류의 범죄로 수배돼 8년간 도피하다가, 공소시효 만료를 2년 앞두고 붙잡혔다. 오래 숨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정리
- 2025년 10~12월, 투자리딩 사기 피해자 555명의 돈 287억 원이 국내 카지노 4곳에서 세탁됐고, 2026년 10월 15일 54명 검거(14명 구속)가 발표됐다.
- 경로는 계좌 → 수표 → 칩 → 바카라 양쪽 베팅 → 현금 → 해외였다. 카지노 전용 계좌가 막히자 수표로 바꿨다.
- 확보한 돈은 약 5억 원으로 피해액의 2%가 안 된다(계산값). 한번 넘어간 돈은 되찾기 어렵다.
- 고수익 미끼, 가짜 HTS, "손실 복구" 제안은 대표적인 경고 신호다. "수수료 줄게, 인출해 줘"는 가해자가 되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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